'진화론과 유전학에 대한 맹신', '개미 사랑' 등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에는 그의 작품임을 티내는 몇 가지 단초들이 항상 존재합니다. 사실 저는 이것들이 듣기 좋은 음악 속 작은 노이즈처럼 거슬립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와의 첫 만남. 인류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를 추적해나가는 <아버지들의 아버지>를 읽은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그 시기에, 돼지와 원숭이 간 교배의 결과로 인류가 시작되었다는 식의 결말을 내는 소설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신선하다기보다는 불쾌한 충격이 뒤따라왔어요. 물론 내가 가진 종교의 영향이 크겠지만, 저는 그런 식으로 인간을 딱 '유전자 운반책(carrier)'정도로만 보는 시각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른 종들과는 구별된 인간만을 향한 신의 섭리를 믿는다는 말입니다(아, 그렇다고 다른 종, 자연 등에 대한 인간의 무분별한 정복을 옹호하는 건 절대 아님). 각설하고, 이러한 이유 등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로도 꾸준히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을 읽어왔던 건 그의 책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그의 견지에서 본 세계를 나름의 상상력으로 재미있게 그려왔습니다. 거기에는 독자를 억지로 자신의 세계관에 편입시키려는 설득이 없고 장황함이 없어서 좋았습니다.
<파라다이스>역시 신앙을 오래 가져오신 우리 어머니 기준에서는 금서목록 상위에 랭크되 마땅합니다(최상위는 아마도 작가의 본명과 실물 사진이 없는 판타지 소설 정도). 허나 충실한 진화론자이자 자연과학에 해박한 지식인으로서 작가가 본 미래와 과거의 있을 법한 단상이 달달하게 그려져 있어 재미있게 읽힙니다.
출처: Science
책 속에서 있을 법한 미래, 있을 법한 과거를 사는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체와 다름없이 대자연의 섭리 속에서 살아남기에 급급하며 종의 위기 앞에서 자신의 유전자를 무사히 전달하기 위해 애쓰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 책에서도 베르베르만의 색채는 강하게 부각됩니다.
환경파괴범을 공원에 교살시키는 인간들, 단합된 개미 떼로부터 달아나기 바쁜 인간, 잘 속이고 잘 속는 인간, 꽃처럼 충매생식하게 된 인간, 여자밖에 남지 않은 인류...
인간은 구분된 존재라 믿는 나같은 사람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파라다이스>의 인류는 그저 지구를 사는 수많은 생명체의 '일종'일 뿐 살아남기에 급급합니다. 이 책에 담긴 모든 과거와 미래의 그림들은 이미 인간 유전자 속에 내재되어 있던 시나리오의 구현입니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그것을 증폭시킨 것 뿐.
"이리하여 인류는 변모했고, 구원되었다."
- <파라다이스>1권 '꽃섹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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