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ok & Film/Shoulders of Giants

[뉴스의 시대,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 모든 사람들이 "굿-뉴스"를 접하는 그 날을 위해

by 지표덕후 2018. 12. 6.

뉴스를 보다 보면, 이 세상은 얼간이들이 굴려가는 것 같고, 마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닥칠 불행을 순서대로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게이트키퍼로서 작금의 언론들이 기사를 선택하고 설명하는 방식 때문이겠지요.



출처: ranksharks.com



그 방식이 한국이나 밖이나 비슷한가 봅니다. 이 책 <뉴스의 시대>의 저자도 대부분의 지면을 저널리즘이 뉴스를 선택하는 작태와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으로 채우고 있으니까요. 


언론은 우리에게 매일 전하는 것들이, 몇 달 혹은 심지어 몇 년에 걸쳐 다듬어진 안목을 통해서만 그 진짜 형태와 논리 구조를 대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야기의 극히 일부만 뽑아낸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길 꺼린다. 


뉴스는 스스로를 현실을 그려내는 권위 있는 초상화가라고 제시할지도 모른다. (중략) 현실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는 빼어난 능력은 없다. 뉴스는 어떤 이야기를 조명하고 어떤 이야기를 빼버릴지 선택하면서 단지 현실을 선택적으로 빚어낼 뿐이다. 


저자는 뉴스의 불완전함을 알리려는 듯 보입니다. 


결국엔 뉴스도 지면이나 시간이라는 물리적 제약 속에서, 오른손 혹은 왼손잡이 기자가 기사를 쓴 것이라는 사실을 수용자가 직시한다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중추적인 역할을, 독자들이 저널리즘에 일임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이 책에서 슬몃 내보입니다.


그러나 <뉴스의 시대>가 수용자의 몰이해를 탓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책의 방점은 뉴스 생산자들의 책무와 도덕성에 찍혀 있습니다. 


저널리즘은 기본적으로 경찰서이고, 이에 더해 세무서의 대리인이자 온갖 종류의 소비자단체인 셈이다. 저널리즘은 맨 먼저 그들이 아니었다면 세간의 이목을 피했을 탈법과 규칙 위반 사례들을 폭로한 다음, 이를 기소하도록 돕고, 그럼으로써 목소리를 낼 수 없는 평범한 시민들의 이익을 보호한다. 


값없이 나오는 책무가 아닙니다. 가진 자의 도덕성과 책무를 말하는 것입니다.


TV만 놓고 본대도 보도 기능을 가진 채널은 이미 뉴스를 전한다는 그 특권 하나로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 특권은 복음을 전하겠다는 사람에게는 문을 꼭꼭 걸어 잠그면서 뉴스는 하루 종일 틀어놓는 대중들이 주는 힘입니다. 기업들은 그런 언론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 협찬을 합니다.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와 달리 언론[사]는 수익을 내야 합니다. 저널리즘은 언론사가 자사의 빌딩과 직원을 유지하는 방식의, 허울 좋은 버전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현체계에서 뉴스는, 어떠한 위법행위도 금품 갈취도 없이 수천 명의 사람들을 굴욕적인 환경에서 살게 만드는 부동산 개발업자를 '보지 못한다.


'빛좋은 개살구 같은 뉴스가 건재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에는 사고하기를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게으른 천성도 한몫합니다.


어떤 사실을 접할 때 최대한 단거리로 결론에 도달하려는 대중의 게으름, 다양한 인과의 가능성과 갈등의 이면을 다각도로 고려해보는 것이 그렇게도 피로한 우리의 약해빠진 정신적 체력. 


때문에 뉴스를 접할 때도 우리의 선입견(이미 내려진 결론)과 편향(늘 가던 편한 길)은 수시로 작동하고, 그렇게 편향된 뉴스와, 사건의 경과와 이미지만을 퍼나르기 바쁜 많은 뉴스들이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편향은 피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뉴스가 사실만을 전달한다면 대중은 이미 가지고 있는 자신들의 편향으로 그것을 해석할 것이기 때문에, 모든 뉴스는 보는 사람의 편향을 강화하고, 확신시키는 기능만을 하게 될 것입니다. 


편향은 사건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려 분투하고 개념이나 사건을 판단할 수 있는 가치의 척도를 제시한다. 편향을 벗어나려는 행동은 그 자체로 지나친 시도로 보인다. (중략) 우리의 임무는 편향된 시각이 생산한 더 믿을 만하고 유익한 뉴스에 올라타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뉴스도 나름의 편향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뉴스생산자가 경계해야 할 것은 편향 그 자체가 아니라 이를테면, 선거 대선 후보자를 분석하면서 특정 후보의 지지자를 의도적으로 많이 출연시키거나, 특정 후보에 대한 비방을 유난히 부각시키는 따위의 '편중된 편향'입니다.


뉴스는 어떤 종류의 신념에 대해서든 의심해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꿔말하면, 대구 사람이 TV조선을 보다가도 신념의 상충으로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뉴스에서도 그카더라!" 라는 말이 특정한 성향을 지닌 사람의 입에서 유독 자주 나온다면, 그 사회는 문제가 있습니다. 뉴스가 특정 범주의 사람들이 겪는 인지부조화를 해소해주고 선별적 정보 선택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작동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념의 좌표에서 깜빡이는 무수히 많은 점들이 마치 예비군들의 영점사격 표적지처럼 한 곳에 편중되지 않도록, 우리 사회 신념의 밭이 단일 품종으로 뒤덮인, 병충해에 취약하고 위태로운 풍경이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뉴스의 시대
국내도서
저자 :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 / 최민우역
출판 : 문학동네 2014.07.30
상세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