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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 Film/Poetry of Silver Screen

[빌리 엘리어트, 스티븐 달드리Stephen Daldry] 아버지의 자존심

by 지표덕후 2018.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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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돌아 다니기 좋아하는 형이 영국에서 웬 뮤지컬을 봤답니다. 근데 말도 안되는 건 그 형이 뮤지컬을 보면서 울었다는 겁니다. 내가 아는 한 이 형은 눈물과는 거리가 멀어요. 형이 눈물을 흘리는 걸 본다면 마치 현영 목소리를 내는 강호동 보는 것만큼이나 어색할 겁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랄까요. 그런 형의 눈물이라니... 그것도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뮤지컬을 보면서! 도대체 뭔 뮤지컬인가 물었더니 '빌리 앨리어트'였답니다. 동명의 영화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나는 형에게 그럼 형은 이 영화 보면서도 울었겠네요 물었더니, 영화는 아직 못 봤다고 합니다. 내가 그 뮤지컬을 볼 순 없으니, 형을 대신해서 영화를 봐주마고 약속했습니다.


1984년 당시의 영국 광산 노동자 파업을 동심의 눈으로 바라본 영화라 하여 가끔 경제학 관련 강의에서 이 영화를 보고 레포트를 제출하라고도 하는 모양입니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노동자 파업 사건의 속사정을 모르는 나도 중간 중간에 나오는 '마거릿 대처'라는 이름에 움찔움찔하는 걸 보면, 역시 영화든, 그림이든, 여행이든 좀 알고 봐야 되는게 맞는 것 같습니다. 노동자들과의 협상을 거부했던 시장경제의 신봉자 마거릿 대처, 철저한 반공주의로 소련에 의해 철의 여인이라는 별칭을 얻었던 마거릿 대처, 레이건과 더불어 신자유주의의 양대 거두로 언급되는 영국의 지도자 마거릿 대처. 빌리의 형과 아버지가 투신했던 광산 노동자 파업은 실제 역사 속에서는 대처의 주문대로, 진압됩니다. 아무튼, 영화 초반에 나는 갑자기 튀어나온 '대처'라는 이름에 내 머릿속에 있던 관련 지식을 검색하느라 영화에 통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영화 <빌리 앨리어트> 스틸이미지



발레라고 아기자기한 여자 영화를 생각하고 보면 낭패 봅니다. 이 영화는 남자 영화입니다. 빌리를 둘러 싼 주변 인물은 온통 마초적 매력을 발산합니다. 심지어 빌리의 발레 선생(윌킨스 부인)마저도 heavy smoker에 남편이랑은 각 방, 섹스도 안 한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습니다. 오죽하면 빌리가 발레를 배우는 곳도 전신거울 박힌 고상한 무용연습실이 아니라 땀내 나는 권투장입니다. 파업에 참여하고 있는 아버지와 형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아버지 배역의 게리 루이스는 연기의 태반이 성난 표정에, 고함에 앙다문 입술입니다. 형은 대사의 절반이 욕이고 볼 때마다 씩씩거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발레를 택한 빌리는 선택의 과정에서도, 실행의 과정에서도 모진 시련의 연속입니다. 


시련에 넘어지지 않게 빌리를 내적으로 북돋아 주는 것은 결국 여성적인 캐릭터들,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머니의 (매우 드문드문한) 격려, 게이 친구인 마이클의 은근한(?) 눈빛... 결정적으로는 돌아가신 어머니. 빌리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엄마라면 하라고 했을 거야"는 아무도 자신의 편은 없다고 느껴지는 공허함에 처방하는 기똥찬 주사 한 방이었을 겁니다.


"빌리를 완전하게 후원하실 건가요? 아니면 아닌가요?"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할 겁니다."



영화 <빌리 앨리어트> 스틸이미지



내면의 동기 부여와 각오만 가지고 독자적 실행으로 이룰 수 있는 꿈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요. 외적인 지원으로 견인하지 않으면 대부분의 꿈은 현실과 이상 중간의 적당한 타협 지점에 푹 퍼져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마초적인 영화였던 이 영화에서 결국 빌리의 꿈을 끌어주는 것은 다름아닌 아버지입니다. 앙다문 입술과 완고해 보이는 일자 주름에서 보듯이 아버지의 고집이 빌리를 훌륭한 발레리노로 키우는 것으로 돌아섰을 때, 그는 자존심도 버리고 - 사측의 노동자를 신랄하게 비난하던 그가 파업을 접고 사측으로 돌아섭니다. 빌리의 오디션 비용을 대기 위해서. 결국 사측으로부터도 노조측으로부터도 조롱을 받게 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빌리를 로얄왕립발레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하여 총력을 다합니다. 영화 후반부의 그 그림들은, 교회라면 치를 떨던 아버지가 나를 위해 새벽기도에 가셨던 과거 어느 때를 보는 것 같아 제 가슴은 터질 듯이 훈훈해졌습다. 마초는 좋은 일을 할 때도 마초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인 겁니다.


"아빠, 발레 하다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도 되죠?"

"농담하니? 니 방 세 놨다."


후에 들은 내용이지만 영화에서는 돌아가신 걸로 나오는 빌리의 어머니가 뮤지컬에서는 비중이 꽤 높답니다. 우리 형의 눈물샘을 폭발시킨 것도 바로 그 어머니가 나오는 장면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부성애에 눈물이 후한 편이지만요.


"우리 꼴을 봐! 우리가 뭘 제시할 수 있겠어? ...

어쩌면 빌리는 발레의 천재일지도 몰라... 빌리에게 기회를 주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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