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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 Film/Poetry of Silver Screen

[눈먼자들의도시,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인간성에 대한 최악의 결론

by 지표덕후 2018.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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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동명 소설은 이미 읽었습니다. 군시절, 책을 좋아하던 한 고참은 <눈먼 자들의 도시> + <눈뜬 자들의 도시> 1+1 행사에 혹해 바로 책을 질렀습니다. "주제 사라마구? 일본인인가..." 이러면서.


책이 왔고, 책장을 처음 펼쳤을 때 우린 당황했습니다. 문단 구분이 안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파본인가... 와, 숨막히는 빽빽함이다"라고 했던 우리는 종국에는 책에 완전 몰입했습니다. 만약 문단 구분이 있어 책에 조금의 여백이라도 생기게 되었더라면 무척 아쉬웠을 것입니다. 읽어야 할 활자가 줄어드는 게 아까울 정도로 단숨에 읽어 나갔습니다. 결말을 향해 가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당연히 영화도 엄청 기대하고 봤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원작소설을 뛰어넘는 영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책 읽으면서 머리 속에 그렸던 나의 영상과 감독이 그려낸 영상을 비교하는 것은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영화는 신체적 기능도, 물질적 기반도 밑바닥에 도달한 인간들이 얼마나 비인간적이 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얄짤없습니다. 그들이 한 데 모여 있는 수용소는 난잡한 성교와 싸질러 놓은 배설물 등으로 축사나 다름 없습니다. 그들 중 비교적 품위를 유지하는 부류는 독보적인 우위(눈이 보이니까)를 점한 의사 부인이나 한쪽 눈이 성치않은 흑인 애꾸 아저씨 정도입니다.


이에 반하는 3동 병실의 꼴통들. 수면 밑으로 가라앉아 버린 인간성에 총이 쥐어지자 꼴통들은 짐승이 되어 버렸습니다.


"거기 아줌마, 방금 들은 목소리 기억해 두겠어."

"나는 네 얼굴을 기억해두지."


 꼴통 중 왕초가 요구하는 바는 가관입니다


 "women for food"


1차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고 게다가 그것을 충족시킬 채널이 극히 제한적이라면? 영화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겠습니다.


"우리 처음 만난 날 기억나?"

"......지금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다들 어떤지 몰라도 나는 내 아내가 가는 거 절대 반대입니다. 이건 인간의 존엄성 문제라고요.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할 수가 있죠?"

"우선 뭐 좀 먹어요. 그 다음에 존엄성에 대해 얘기 하도록 하죠."


인간을 인간일 수 있게 만든다는 존엄성, 추억, 예절 등등... 사치고 허구일 뿐입니다. 적어도 영화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나중에 수용소에서 탈출하고 마트에서 먹을 것도 좀 빼오고 집에서 뜨끈한 물에 몸도 좀 지지니까 인간성이 스멀스멀 되살아나는 모습은 실소를 자아냅니다. 엔딩을 향해 달려가는 시점에서 인간성의 회복은 희망적인 메시지가 될 수도 있었겠으나, 제 눈에는 오히려 인간의 이중적인 면만 적나라하게 부각된 것 같아 씁쓸했습니다.


"모두 다 눈이 멀게 된 것보다 더 두려운 건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작태를 처음부터 끝까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의사의 아내(줄리언 무어 분)의 이 대사에는 인간성에 대한 최악의 결론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차라리 보지 못 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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