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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 Film/Poetry of Silver Screen

[엽문, 엽위신] 엽사부가 소매 걷으면 게임 끝

by 지표덕후 2018.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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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가 깊지 않을 때에 사람들은 영화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대화의 소재가 고갈되어 정적이 흐를 때면 곧잘 영화 이야기로 넘어가곤 하는데, 이 경우 영화 이야기만으도 축 쳐진 분위기에 약간의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이런 류의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면 어김 없이 나오는 질문, "최고로 치는 영화가 뭐예요?" 대개 이 질문이 던져지고 대화는 또 다시 공황상태에 빠집니다. 나의 경험상 이 질문에 즉각적으로 "예, 저는 <OO>를 최고의 영화로 꼽습니다"라고 답변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영화마다 주는 감동의 종류가 다르고 하나의 영화 내에서도 감명을 받은 장면이 몇 가지나 될 터인데 어떻게 그것들을 뭉떵거려서 영화의 서열을 매기겠는가 말입니다. 다만 저의 경우는 시원한 액션과 더불어 저의 간지러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었던 영화가 있어, 그 영화를 내 생애 최고의 '무술'영화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 영화가 개봉할 즈음에 중국에서 난징 대학살을 소재로 한 영화가 개봉되어 전대미문의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해묵은 역사를 들춰내 반일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라 달가울리 없는 일이겠지요. 실제로 그런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를 어째, 이 영화 <엽문> 역시 일본인들 혈압 좀 올릴 만한 영화입니다. 특히 개봉 직후 두 주연배우가 홍보차 한국을 방문했고, 영화를 본 관객들의 평가도 호평 일색이라 우리나라에서도 꽤 선전을 했었습니다. 영화의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한 '엽문'은 절권도의 창시자 이소룡의 실제 스승인 영춘권의 달인입니다. 영화는 그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지요. 어찌보면 무인 곽원갑이랑 비슷한 시대적 배경에, 관통하는 줄거리도 오십소백이라 헷갈릴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엽문에게 세 표 던집니다.




왜냐하면, 정무문에서 애띤 얼굴로 보았던 견자단이 세월의 흔적을 눈가에 묻히고 나와 격투기가 아닌 정통무술을 구사하는 영화라 좋았고, 무엇보다 이 영화가 더 재밌으니까요. 의리, 형제애, 조국애, 가족애로 똘똘 뭉친 착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 영화는 분명 무술영화지만 전혀 호전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심지어 싸움조차 훈훈하달까요. 어쩌면 엽문의 영춘권이 여성의 무술이라 그런지도... 하지만 무술의 본고장 불산의 소소한 일상 - 소소한 일상이 무술고수들의 대련 ;; - 을 그리고 있는 전반부와 달리, 중일전쟁 이후를 그리고 있는 후반부는 왠지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느낌입니다. 전체적인 화면의 색조가 어두워지고 사람들의 굳게 다문 입술과 결연한 눈빛이 자주 화면을 채웁니다.



영화 <엽문> 스틸이미지


 

결말이야 생각하는 그대로이지만, 무술영화 누가 스토리로 보나요... 가끔 무술영화 보면서 다이나믹 스펙타클 영상을 잡아내기 위해 감독들은 어떻게 할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영화를 보면 '에이 이거 뭐...' 싶을 때가 있고 어떤 걸 보면 '와 작살난다...' 라고 감탄할 때가 있습니다. 제일 비호감인 것은 되도 않게 화면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어설프게 다이나믹을 시도하는 경우인데 그런 카메라 무빙이 적절하다고 생각된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인물의 움직임을 시원시원하게 잡아내는 데 카메라가 굳이 기교를 부릴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무술 37단의 견자단이 몸을 움직일 때 가식없이 담백하게 담아내니 내가 안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빠르고, 또 시원시원합니다. 화면에서 바람이 샥샥 부는 느낌이랄까요. 와이어 액션도 최소한으로 한 것 같은데 그것마저 딱 제 스타일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엽문의 목인형 수련 장면. 몽타주 기법으로 영화 중간에 삽입되어 중국과 엽문 가정에 생긴 변고를 암시하는 장치



영화 속 무술 장면이 뭔가 꽉 차서 박진감 있게 보이는 이유는 카메라가 상당히 가까이서 잡았기 때문인데, 이는 영춘권 자체의 특성에서 기인합니다. 엽문의 무술 동작을 보면 탁탁 짧게 끊어 빠르게 치는 손기술이 대부분입니다. 영화를 여러 번 보다보면 그가 다리를 허리 이상 좀처럼 올리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영춘권 등 중국 남방지역에서 행해졌던 무술들의 특성입니다. 덥고 습한 지역이라 큰 동작을 구사하면 쉽게 지쳐버리기 때문입니다. 북방지역의 무술들은 이와 반대입니다. 춥고 건조한 기후를 이기기 위해 뛰거나 높이 차는 활달한 동작들이 많습니다. 영화 전반부에 북방지역에서 온 건달이 엽문과 대련하는 장면은 이러한 배경지식을 갖춘다면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보게 될 겁니다.





"무술이란 비록 일종의 무력이지만 우리 중국의 무술은 유가 철학인 무덕. 즉, 인을 지니고 있어 남을 헤아릴 줄 안다. 너희 일본인들은 평생 이해하지 못할 이치이다. 너희들은 힘을 남용하고 무술을 무력을 폭력으로 바꿔 사람들을 억압하기에 중국무술을 배울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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