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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 Film/Shoulders of Giants

[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삶의 불가해(海)를 무력하게 떠다니는 부표 같은 인생

by 지표덕후 2018. 11. 16.

영화 <환상의 빛>이 침묵과 어두운 그림자로 많이 채워진 탓에, 영화가 끝난 뒤에 형언할 수 없는 허전한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원작소설은 어떨까 싶어, 읽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들었지요.


명동에 있는 인터파크 북파크에 책을 사러 갔는데, 마침 판매용 재고는 없고 열람용만 있다고 하더군요, 무려 세 권이나 있었습니다. 한 권 꺼내가지고 아무데나 걸터앉아 내리 읽었습니다. 중편 정도의 분량이라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소설은 유미코가 죽은 남편(이쿠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쓰여 있습니다. 영화가 줄곧 롱테이크와 절제된 빛으로 유미코의 감정을 뭉근하게 전달한 것을 생각하면 서간체라는 형식은 굉장히 의외였지요. 왜냐하면 편지는 상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발각될 염려 없이 온전히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이니까요. 편지를 쓰다보면 그 아늑함 때문에 종종 의도치 않게 감정이 증폭될 때조차 있지요. 


그러므로 유미코의 편지를 통해 저는 영화에서는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황망함의 '깊이'와 '길이'의 좌표를 좀 더 정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타인의 억측이 미치지 못하는, 아무런 이유도 발견되지 않는 자살이라는 형태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발을 동동 구를 만한 분함과 슬픔 덕분에 오늘까지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것을 위한 각별한 노력이나 궁리를 한 것도 아닌데 다미오 씨와 도모코는 이제 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미코에게 괴로운 질문의 연쇄를 목에 걸어주고 동시에 그 연쇄를 풀어줄 사람을 앗아가는 것이 '삶의 폭력'이라면, 의식할 새도 없이 그 빈자리를 채워놓는 것이 '삶의 위안'입니다.


도모코 옆으로 가서, 

"오늘부터 내가 네 엄마야."

하고 말했습니다. 그 때 얼굴을 획 들고 웃어준 도모코, 분명히 여자아이임에 틀림없는 그 아이의 냄새를 코끝으로 맡는 순간 저는 그 때까지 자신 없이 웅크리고 있던 자신의 마음을 시원하게 똑바로 펼 수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내가 오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내내 기다려주었구나, 하고 생각하자 갑자기 힘이 나서 눅눅한 집안 분위기도, 아주 가까이서 들려오는 해명소리도, 까맣게 빛나는 마루방의 냉랭함이나 잘 안나오는 텔레비전 화면도 수 년 전부터 써와서 익숙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영화 <환상의 빛> 스틸이미지



결국 바다를 떠다니는 부표 같은 우리 인생, 그 바다의 이름은 불가해입니다. 말 그대로 우리의 이해가 닿지 않는 망망대해입니다. 거기에 부표는 두둥실 떠있습니다. 잔잔한 바다에 누워있듯 인생이 이대로만 흘러 갔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때로 거친 풍랑 속에서 멀미가 날 정도로 삶이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우리를 끌어내리는 힘에 순응한다면 수면에서의 소란이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힘들이 우리를 밀어올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끌어내려진 것들에게 보내는 대답을 기대할 수 없는 질문조차도 그 힘의 일부가 되기도 합니다. 




환상의 빛
국내도서
저자 : 미야모토 테루 / 송태욱역
출판 : 서커스 2010.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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