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여느 때와 같이 학사 식당에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데 목사님이 오셔서 동석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높으신 연배와 차분하신 성품을 생각할 때 침묵 속에서 밥을 먹는 건 당연했지요. 부지런히 팔만 왔다갔다하고 있는 그 때 목사님이 한마디 하셨습니다. "자네, 여행책 같은 거 좋아하나?", "아 당연하죠!"라고 말할 뻔 했습니다. 저는 모든 책의 장르 중에 수필(기행문도 수필의 한 갈래이니)을 가장 선호하거든요. 그렇다고 경박스럽게 저렇게 동의할 수는 없는 법, "예, 즐겨 읽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흡족한 표정의 목사님께서 식사도 마치지 않으시고 목양실로 뛰어올라가 가져오신 것이 이 책, <헉Hug! 아프리카Africa>였습니다. 노란색 표지에 서툰 듯한 일러스트가 정감가는, 한 마디로 첫인상이 좋은 책이었습니다. 특히 저자를 보고 더 끌렸습니다다. 느낌표를 연출했던 MBC 김영희 PD가 글을 쓰고, 삽화도 그리고, 사진도 찍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의 뜻밖의 취저에 그날 저녁은 기분 좋았습니다.
이 아저씨가 책의 저자이자 전MBC PD인 김영희. 출처: 한겨레.
이 책으로 아프리카 여행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한다면 완전히 잘못 짚은 겁니다. 그런 목적이라면 <론리 플래닛> 아프리카 편을 사는 것이 나을 겁니다. 물론 저자가 대륙을 종횡무진하면서 큰 감흥을 받은 몇 군데는 비교적 자세히 소개되어 있지만 이 책은 기행문이라기보다 차라리 다이어리에 가깝습니다. 어떤 느낌이냐면 하루 웬종일 땡볕을 돌아다닌 저자가 하루 일과를 마무리할 때 즈음 게스트하우스 벽에 등을 기대고 그 날 있었던 일을... 피곤하니까 대충 쓰고, 그림 좋아하니까 늘 가지고 다니는 스케치북에 그림 하나 쓱쓱 그린 다음에, 짤막한 생각을 적음으로써 책을 완성한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이 책은 참으로 편안하게 읽힙니다.
대략 이런 식의 이야기들로 가득 차있어요. 승마를 하는데 도무지 아귀가 맞지 않는 안장에다가, 들썩들썩거리는 말 등짝 위에 있으니 궁디가 다 까졌다고 투덜거리는 와중에, 앞에 가는 두 백인 여인들도 엉덩이가 다 까졌는지 엉덩이를 안장에 차마 밀착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을 뒤에서 본 저자, 인간사 망해도 같이 망하고 흥해도 같이 흥하는 거라며 "같이 사는 세상이다!"라고 주억거립니다.
그런저런 주억거림과 혼잣말을 읽다보면 유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케이프 타운의 정취, 매연과 소음, 헐벗음과 굶주림으로 가득찬 말리, 하늘 아래 가장 경이로운 자연 '빅토리아 폭포', 우직하고 순수하게 저자를 도와준 사람들, 반면에 등쳐먹으려 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에피소드들은 모여서 우리가 잘 몰랐던 아프리카에 대한 윤곽을 대략이나마 그려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사는 동네와 그닥 다르지 않음에 놀라게 되지요. 결국 어디든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것... 다만 그곳에는 압도적인 규모의 대자연과 거기서 일상을 살아가는 많은 (인간 외의) 생명들이 있습니다. 페이지를 채우고 있는 저자의 단상들은 휴머니즘적인 프로그램을 제작해온 그의 이력이나 선선한 인상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자연과 동물과 사람들에 대한 온정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처음 이방인으로서 아프리카를 찾아와 '터스커'(아프리카의 맛있는 맥주)를 주문할 때마다 "시원한-"(냉장고가 귀해 냉장되지 않은 맥주를 마신다고 합니다. 시원한 맥주를 찾는 사람은 대게 외국인 관광객들)을 붙여야했던 저자는 귀국 즈음에서야 거리낌없이 뜨뜻미지근한 터스커를 마실 수 있게 됩니다. 여행은 슬픕니다. 그 때쯤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배낭을 싸야하니까요.
덧. 언젠가 아프리카 가보고 싶은 마음에 간단한 스와힐리어 회화 투척
아싼테 싸나(Thank you very much), 폴레 싸나(very sorry), 콰헤리(bye bye), 니이페 싼가피(how much), 라피키(friend), 투오나네 캐쇼(see you tomorrow), 터스커 바리디(cold tusker), 카리브 싸나(welcome), 하쿠나마타타(no prob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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