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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 Film/Shoulders of Giants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 교회라는 일그러진 거울에 비추어진 중세사

by 지표덕후 2018. 11. 11.

동일한 영화를 두 번째 볼 때면 처음 볼 때에는 미처 눈치 채지 못하였던 부분이 눈에 들어오기도 하고, 무심코 지나갔던 장면을 접하면서 그 속에 내재된 메시지를 포착해내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고등학교 시절 은사님은 책을 꼭 두 번 이상 볼 것을 학생들에게 권하셨습니다. 특히 문학의 경우 저자는 자신의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전하는 법 없이 수많은 문학적 장치들을 사용하여 그것을 둘러말하게 되므로 이런 활동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셨습니다. 책을 읽는 재미와 사상의 전달 사이에서 몇 날 며칠을 고민했을 저자로부터 행간에 숨겨둔 진정한 의미들을 잡아내기에 단 한 번 그 책을 독파하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이유도 덧붙이셨습니다.


중세의 커뮤니케이션 실태를 고발하는 생생한 묘사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어려운 책입니다. 기호학자이며 동시에 뛰어난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저자의 화려한 이력이 그것을 암시하고, 거의 매페이지마다 자신의 영역을 고정적으로 할당받고 있는 긴 주석들은 소설이 가지는 '만만함'이라는 장르적 이점을 이 책에서 앗아갑니다. 구어체라고 하기에는 어색하고 무언가 주저리주저리 설명하는 듯한 만연체의 문장과 발음하기도 힘든 고유명사들이 난무한다는 점도 독서의 속도를 더디게 합니다. 덕분에 이 책을 처음 접했던 고등학교 시절, 저는 몇 번의 중도포기 위기를 겪었습니다. 


책의 전반을 아우르는 저자의 해박한 중세 기독교사(史) 지식과 숱하게 등장하는 이단논쟁들은 마치 동시에 여러 권의 책을 읽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합니다. 이 말은 <장미의 이름>이라는 한 권의 책이 가지는 주안점이 다양하다는 것이며, 능력과 의지에 따라서 독자는 텍스트를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보기에 <장미의 이름>은 통시적인 커뮤니케이션 변동의 선상에서, '중세' 부분을 증언하는 자료로서 가치가 높은 작품입니다. 당시의 사상과 그 사상의 전파에 대한 상이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대중을 위험요소로 본 교회 중심의 폐쇄적 커뮤니케이션


흔히 중세를 표현할 때 우리는 '암흑기'라는 말을 주저없이 사용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광적으로 신앙에 집착하였던 때, 그로 인해 이성적인 사고가 마비되고 동류가 아닌 피아에 대한 탄압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던 시기이기에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피아는 당대 유럽의 정신 그 자체이자 절대권력이었던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위협이 되는 모든 것들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이슬람교나 동방의 기독교와 같은 외부적인 세력일수도 있고 서유럽 사회 내에서 가톨릭 교회의 부패에 반작용적으로 생겨난 이교도일 수도 있습니다. 지식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가톨릭 교회가 이런 위협 세력들로부터 기득권을 지켜내기 위하여 사용하였던 전략은 다름 아닌, 외부세계와의 분리나 내부사회의 일부를 격리하는 것과 같이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리 내에서만 순환하는 교리와 의사소통 구조를 통하여 배제되고 격퇴되어야만 하는 새로운 모습의 피아를 끊임없이 재생산해내었습니다. ‘이단’과 ‘불신자’가 그것인데 이 두 이름은 ‘악마’라는 하나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윌리엄, 그러나 나는 알았네. 분명히 알았네. 그자들은 밤이면 지하실에 모여 갓난아이 하나를 공중으로 던지고 받고 했다네. 아이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리하였다네……. …그자들은 아이의 시체를 찢어 밀가루에 버무렸네. 그걸로 신을 모독하는 성체(聖體)를 만든답시고 산 아이를 그렇게 했다고 하네.”(119쪽)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사람임을 보여준 바 있는 명망있는 성직자 우베르티노가 어떻게 이러한 이야기를 믿으며, 마찬가지로 이성있는 사람을 설득하는 근거로서 사용할 수 있을까요. 그의 말은 중세 지식인으로 대표되는 성직자들이 당시 가졌던, 당대의 대중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들에게 대중은 무지몽매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악마의 계획을 위하여 헌신할 가능성이 있고, 그러므로 교화하고 점검해야할 대상에 다름 아니었던 것입니다.


“여행 중에 사부님은 대중과 배우지 못한 사람을 지칭하는 뜻으로 <범부>, 혹은 <평신도>라는 말을 자주 썼다.”(344쪽)


“또, 단순한 평신도의 경험은 야만스럽고 통제하기 어려운 결과를 부르는 법이라고 하셨다.”(376쪽)


교회는 민중들이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생각할 줄 알고 거기에 대응할 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불순한 이념에 오염된 소수의 광신자들에 의해 얼마든지 진리에 등돌릴 수 있는 아둔한 존재로 간주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스스로를 고매하게 여기는 이들, 성경적 진리의 수호자들은 정상적인 의사소통의 상대로서 민중을 상정하지 않은 채 오로지 ‘교리대로,’ 혹은 ‘이단 단죄’ 식의 잣대로 대중을 판단하고 심판하게 됩니다. 어느 수정주의 역사학자에 따르면 11세기에서 12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에 새롭게 이단으로 분류된 것들은 이전보다 인민 대중에 좀 더 밀접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민중들 사이에서는 정치에 시중들고 민중을 착취하는, 이른바 '세속화'된 교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생겼다는 방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교회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저항하는 민중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진리에 가장 근접해 있다고 믿고 있는 교회는 교리를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필요하다면 구실을 만들어 심판하고, 단죄하는 대민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고수하게 됩니다. 교회와 민중 사이의 의사전달의 방향성은 이즈음 갈수록 일반통행으로 변모했으며, 역으로 민중이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채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 즉 교회의 부정과 부패에 비판적인 관점을 견지하는 민중들은 그들의 불만을 또다시 극단적인 수단으로밖에 표출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주도한 이들은 그들의 교리가 교회에 의하여 전부 혹은 일부가 받아들여진 경우에도 교회의 통제로부터 벗어났다는 이유로 단죄의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악마’ 혹은 ‘적그리스도(가짜 그리스도)’로 낙인 찍혀 교회에서 동원한 군대의 창칼에 찔리거나 이단심판소에 의해 화형주의 재물로 죽어갔습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살바토레’는 윌리엄이 표현한 <범부>에 어울리는 인물입니다. 배우지 못하였기에 자신이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지각도 없이 살인을 저지르며 비현실적인 감언이설에 넘어가 도당의 무리에 합류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주유하다가 우연히 교회 내에서 주류에 속하는 베네딕트 수도회의 한 수도원에 숨어들었지만, 그는 끝내 자신의 본질적인 삶의 질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고작 식료계의 조수 일을 하며 세속에서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며 생활합니다. 이러한 살바토레가 외관상 추한 모습을 하고 있고, 언어 구사능력도 어눌하다는 설정은 우연이 아닙니다. 살바토레는 자신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기독교 세계를 살아가는 대중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신성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기독교의 교리에 대하여 나름의 언어로 비판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진지하게 듣는 이가 없습니다. 그의 모습은 당시의 커뮤니케이션 채널에서 활로를 찾지 못한 민중들의 삶의 초상인 것입니다.


교회에 의한 선별적인 지식 전달


“이 수도원은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도 학자들의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수도사들은 서로 의견을 나누어 제 학문의 보고에 보물을 늘려 나가는 것이 오히려 본분에 어울리는 것이 아닐는지요.”(136쪽)


이 시대의 학자란 수도사들이요, 학문이란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는 데 시중드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수도원은 수도사들이 학문을 연마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지식을 담은 서적들을 번역하고 필사하는 인쇄소의 역할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학문으로서 다루는 영역은 제한적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가르침을 지식으로 인정하기에는 그들이 진리라 여기는 성경적 가르침에 반하는 요소들이 너무 많았던 탓입니다. (이후는 스포일러주의!!) 결국 소설의 종국에 밝혀지듯이 지식의 세력 판도에서 이미 기득권을 선점하고 있었던 가톨릭 교회는 그들의 가르침에 반하는 세속의 지식은 이단이라 칭하며 금서로 지정하였고, 이에 대한 접근을 막기 위해서라면 생명을 앗아가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소설 속에서 젊은 생명이 살해당한 이유가 고작 '웃음은 예술이며 식자들의 마음이 열리는 세상의 문이다'라는 내용을 다룬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시학> 제2권의 필사본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당시 기독교의 폐쇄성에 대한 방증입니다. ‘그리스도는 웃지 않았다’라는 그들의 교리적 이론을 방어하기 위하여 위대한 석학의 저서를 봉인시켜 놓았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지식의 생산과 복제를 수도원에서 일임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통제는 가톨릭 교회가 가진 막강한 힘 그 자체였습니다. 지식에 있어서 교회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이전에 없던 사실조차 만들어내 '지식'으로 탈바꿈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 시기 있었던 종교재판의 사례 중 죽은 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아르노 젤리스(Arnaud Gelis)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롭습니다. 원칙적으로 교회는 죽은 자와 대화하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재판 중 교회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은 이 죽은 사람들이 징벌, 고행, 그리고 영혼의 구제가 사제의 개입 없이도 해결될 수 있다는 민중들의 생각을 확인시켜준다는 점이었습니다. 교회를 통하지 않고도 구원될 수 있다는 이런 생각에 대하여 교회는 ‘휴식’이 아닌 '벌'을 받는 장소로서의 연옥의 개념을 만들어내고, 살아 있는 사람과 직접 교통하는 모든 유령들을 그 연옥이라는 장소에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격리시켜버렸습니다. 또한 죽은 사람의 고통을 미사나 선행 혹은 면죄부를 통해 경감시키거나 혹은 고통의 기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협상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성직자에 의한 중재를 강요하였습니다. 이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민중들의 믿음과 관념을 지배하는 상식이 되었습니다.


“대중의 공포를 유발시키고 이로써 신앙심과 믿음에의 열의를 부추기고, …인간의 법과 하느님의 법을 공히 준봉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답시고 공공연히 극언은 물론 끔찍한 위협까지도 망설이지 않고 있다. …오늘날처럼 평신도의 신앙을 연단한답시고 지옥의 불길로 을러메는 일도 없었다.”(219쪽)


따라서 그 시대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도 왜곡되거나 편향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장미의 이름>이 묘사하는 당시 대다수의 민중들, 즉 속인들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들은 성직자들이 알 만한 가치가 있다고 간주한 것들뿐입니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지식을 생산하고 알아야 할 것과 알아선 안 되는 것들을 판단하며, 그것을 전달하는 통로까지를 독점했던 교회는 그 자체로 그 시대를 창조해 내기에 충분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였다는 성경의 으뜸가는 원칙을 그들도 나름대로 모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라는 일그러진 거울


“수도원이 Speculum mundi(세상의 거울)라면 해답은 자명해졌을 테지.”


중세는 1000년에 있었던 대발전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종종 잊혀집니다. 당시의 백성들은 폭발적인 생산량의 증대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교회가 하달하는 교리대로 신앙생활만 한다면 천년지복의 영광을 꿈꾸며 지상에서의 삶을 나름대로 행복하게 영위해 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입장에서 산발적으로 튀어나오는 불온분자들은 권위에 대항하는 위험한 존재였고 하늘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생명을 부지할 가치가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물며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때문에 교회는 그런 불온분자들을 가차없이 쳐나갔습니다. 결국 암흑기를 만든 것은 교회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침묵하는 다수와 맞대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역사가 - 성직자이기도 했던 - 들은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그들이 내고자 했던 목소리를 묻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지식의 보고라던 수도원은 당시의 세상을 우리에게 일그러진 상으로 비추고 있는 거울에 불과한 것입니다.



장미의 이름 세트
국내도서
저자 :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 이윤기(Lee EyunKee)역
출판 : 열린책들 200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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