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싯적에 <칼의 노래>를 읽어보려고 집어들었다가 너무나 무뚝뚝한 문장에 질려서 놓아버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후 다시 김훈 작가의 작품을 접한 것은 군에 복무할 때 <남한산성>을 통해서였습니다. 읽으면서 내내 감탄했더랬지요. 문장이 정말 멋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중언부언하며 미사여구를 동원한 긴 문장이 아니라 할말만 하고 빠지는 짧은 호흡의 문장이었습니다. 한 신문방송학과 교수님이 그의 문체를 언급하면서 '칼로 조각한 것 같다'고 평했는데 <칼의 노래>, <현의 노래>, <공무도하> 등 이후로 그의 책을 꾸준히 읽은 제가 느끼기에도 그만큼 적확한 표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출처: 중앙시사매거진(사진: 권혁재)
아무튼 처음에 저는 '칼로 벼린 것 같은 문장으로 쓴 수필은 어떨까?'라는 호기심에 이 책, <밥벌이의 지겨움>을 읽게 되었습니다.
수필을 읽다보면 저자들이 저마다의 일상을 매개로 풀어놓는 사색들에 감복하고 매료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슷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나는 그냥 지나치며 별 특별할 것 없는, 말 그대로 '일상'으로 치부한 시간이 어떤 이에게는 '집필거리'가 된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수필이라는 장르의 매력은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읽고나면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게 소설을 읽고 난 후나 처세서를 읽고난 후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이 책에 대한 첫 인상은 전직 기자이자 굵직굵직한 역사소설을 집필한 작가의 수필이 예상 밖의 너무나 일상적인 소재로 시작하는 데 대한 놀라움이었습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요. 그는 망치로 못을 박는다거나, 개다리가 땅을 박차는 장면, 길 가는 여자의 표정, 젖가슴에 대한 예찬, 나무 위에 걸려 있는 까치둥지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그러나 읽다보면 짧은 글, 하찮은 소재일지언정 사색의 깊이는 결코 그러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독백, 스스로에 대한 자조, 때론 독자에게 하는 무뚝뚝한 충고처럼 다가오는 그의 짤막짤막한 글들은 주워모아보면 작가의 지금 모습을, 이상적인 자화상을, 지금의 세상을, 이랬으면 좋겠다는 앞으로의 세상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자동차가 많아졌으니 되도록이면 밖에 나가지 않겠다는 읊조림이나 말로 세상을 바꾸는 일이 이처럼 어려워야 하는가라는 탄식은 담담하지만 어떤 방향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허나 이 책 역시 대부분의 수필이 그러하듯이 부조리를 잡아내는 데에는 예리하지만 발전적인 방향을 일러주는 데에는 무딥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글 전반에서 느껴지는 묘한 무기력감이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인간 세상의 한가운데라 할 수 있는 지하철, 특히 만원 지하철에서 읽으며 학교에 공부하러 갈 때에 나는 약간 침울해졌었습니다.
작가는 1972년 격동의 세월에 기자생활을 시작하여 사회부에 근무하면서 이 나라에 있었던 투쟁의 현장을 거의 항상 곁에서 지켜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칼의 노래>, <남한산성> 등 그의 역사소설에서는 그토록 처연한 억압과 굴종의 순간을 서술하는 문장에조차 담담함이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수필을 통해 알게 된 이 노작가는 왠지 이제는 삶의 고단함에 지쳐 있는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자전거나 굴리며, 차도 없고 사람도 없는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고파 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
'Book & Film > Shoulders of Giant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아이들에게 본이 되는 어른입니까 (0) | 2018.11.16 |
---|---|
[그건사랑이었네, 한비야] 일상생활이 사랑의 실천인 삶 (0) | 2018.11.15 |
[헉! 아프리카, 김영희] 쌀집아저씨(김영희 PD)가 그리고, 찍고, 쓴 아프리카 (0) | 2018.11.14 |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 교회라는 일그러진 거울에 비추어진 중세사 (0) | 2018.11.11 |
[파리의 노트르담, 빅토르 위고]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으로 읽으니, 대성당이 달리 보였다 (0) | 2018.11.10 |
댓글